디지털에 구현한 리얼 라이프 | 김재환 EVR스튜디오 대표
땀구멍, 솜털, 표정을 지을 때마다 달라지는 주름. EVR스튜디오가 선보인 디지털휴먼은 실사와 가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삶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메타버스 세계도 그렇다.
1998년 등장한 ‘사이버가수’ 아담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불운아였다. 1집 앨범이 20만 장이나 팔리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뒀지만, 결과적으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졌는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전설로 끝나버렸다.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 사이버가수라는 이름은 ‘디지털휴먼’이라는 존재로 대체됐다. 못다 이룬 아담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로지와 미켈라, 이마는 수백억원대 수입을 올리며 명품 모델로 나서는 등 MZ세대가 열광하는 인플루언서가 됐다.
스캔들을 일으킬 염려도 없고, 약속에 펑크 낼 일도 없는 디지털휴먼의 활약은 기술의 진보와 맞닿아 있다. 최근 등장하는 디지털휴먼들은 실사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의 퀄리티로 가상인간에 대한 거부감을 뜻하는 언캐니밸리(uncanny valley)를 넘어섰다.
지난 2016년 설립된 EVR스튜디오(이하 EVR)는 국내 디지털휴먼 전문기업 중 최고의 퀄리티를 인정받은 곳이다. 2019년에는 미국의 세계적인 게임사 에픽게임즈가 주는 ‘언리얼 데브 그랜트(Unreal Dev Grant)’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와 디지털의 경계를 허무는 개발사”라는 극찬을 얻어내면서다.
글로벌 인플루언서로 떠오른 디지털휴먼
▎디지털휴먼 프로젝트 중 하나인 ‘시라’(왼쪽)와 게임 ‘무당’에 등장하는 허성태 배우의 디지털휴먼.
EVR은 2016년 출범 당시부터 국내 게임산업을 대표하는 초호화 멤버로 업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 각자대표 중 한 명인 김재환 대표는 2002년 엔씨소프트 북미지사의 퍼블리싱 프로듀서로 일했다. 이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엑스엘게임즈에서 MMORPG ‘문명온라인’ 개발을 진두지휘한 총괄 프로젝트 매니저 출신이다.
김 대표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윤용기 대표는 다수의 대작 콘솔게임 개발을 시작으로 엔씨소프트의 글로벌 아트디렉터로 활약하며 ‘타뷸라 라사’, ‘길드워2’, ‘와일드 스타’ 등을 개발했다. 엔씨소프트 ‘리니지 이터널’과 엑스엘게임즈 ‘아키에이지’ 등 대작 MMORPG 개발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이 밖에도 EVR에는 할리우드와 대형 게임사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은 시각효과(VFX) 전문가와 개발자들이 즐비하다. 김 대표는 “EVR의 디지털휴먼 제작 능력을 바탕으로 차세대 콘솔게임 개발과 메타버스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게임 제작사가 디지털휴먼 기술에 공들인 이유가 궁금하다.
2016년 창립 초기에는 가상현실(VR) 기반의 게임 개발을 목표로 했다. 게임 속 가상의 친구와 스카이다이빙을 즐기고 해변을 걷는 실감형 콘텐트다. 하지만 VR 시장의 성장세가 예상보다 더뎠다. 2018년 들어 VR 게임 개발은 잠정 중단한 상태다. 다만 디지털휴먼은 게임이라는 장르를 떠나서도 다양하게 활용될 거라 봤다. 결과적으로 6년 넘게 디지털휴먼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셈이다. 결과적으로 예상이 적중했다. 최근 디지털 인플루언서가 인기를 끌면서 엔터테인먼트사를 비롯한 여러 대기업에서 협업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EVR의 디지털휴먼 제작 역량은 어느 정도인가.
할리우드에선 이미 영화 제작에 활용된 지 오래다. 거기선 ‘디지털더블’이라 부른다. 배우가 직접 하기 어려운 위험한 장면이나 현실로 재현하기 어려운 작업을 디지털휴먼이 대신한다. 현재 영화 속 디지털더블은 관객이 알아채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 현재 우리 기술은 할리우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수준이다.
경쟁사가 선보이는 디지털휴먼과 차별점이 있어야겠다.
언캐니밸리를 넘어섰다는 시각적인 만족도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다. EVR의 독창적인 기술은 리얼타임, 즉 실시간 반응이 가능한 디지털휴먼이다. 특정한 장면 만을 위해 만들어낸 VFX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우리가 정의한 리얼타임 디지털휴먼은 구조화된 3D 형체를 지닌 존재다. 기존 VFX로 만들어낸 영화 속 디지털휴먼이 단순한 컴퓨터그래픽(CG)에 가깝다면, EVR의 디지털휴먼은 사람의 뼈대, 피부 조직과 움직임, 구강 구조까지 입체적으로 스캔해 제작한다. 이를 통해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인공지능(AI)과 연동해 인풋을 주면 디지털휴먼이 그대로 아웃풋을 재현하도록 제작하는 게 가능해졌다.
지난 6년간 디지털휴먼 제작 능력을 고도화해온 EVR의 노력은 자체 개발한 3D 광학스캔장비 라이트스피어(Light Sphere)로 결실을 맺었다. 일반 카메라 기반의 스캐너보다 100배 높은 정밀도를 가지고 있어, 인체 피부 반사율, 피부 아래의 블러드 프래셔(blood pressure)까지 정확히 측정해내는 장비다. 김 대표는 인터뷰 중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푯말이 붙은 방으로 안내해 라이트스피어 장비를 직접 소개했다.
디지털휴먼이 메타버스에 어떻게 적용되나.
실사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의 디지털휴먼 퀄리티가 EVR의 최대 강점이다. 게다가 3D 스캐닝을 통해 실시 간 제어가 가능하다. 영화 속 2차원 영상에선 3D 구조를 재현하기 어렵다. 메타버스는 유저 수천만 명이 함께하는 MMORPG처럼 실시간 인터랙티브가 핵심이다. 유저가 원하는 인풋을 넣었을 때, 디지털휴먼이 이를 완벽히 재현해낸 아웃풋을 보여주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EVR의 디지털휴먼은 인터랙티브가 필요한 메타버스, 인플루언서, 엔터테인먼트, AI 비서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
드라마 [킹덤], [지리산]을 제작한 에이스토리와 파트너십을 체결해 화제다.
2021년 11월 에이스토리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양 사의 제휴 관계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에이스토리의 전략 지분투자도 이어졌다. 현재 에이스토리는 석정현 작가의 웹툰 ‘무당’의 드라마 제작을 확정한 상태다. 드라마 [빈센조]를 쓴 박재범 작가가 참여하는 대작으로, 2023년 글로벌 OTT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우리는 무당의 IP와 세계관을 바탕으로 3인칭 액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을 개발 중이다. 드라마 주인공으로 나선 이홍내, 허성태, 금광산 같은 배우들을 리얼타임 풀 3D 기술로 스캔해 실사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의 극사실적 캐릭터로 제작한다. 영화 [범죄도시]를 만든 강윤성 감독이 시네마틱 디렉터로 참여하는 등 AAA급 게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급이란 뜻이다.
게임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였던 디지털휴먼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처음엔 VR 게임 개발로 시작했지만, 디지털휴먼 기술을 계속 고도화한 결실을 이제야 맺는 것 같다. 무당 게임 개발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와 기업에서 러브콜이 오고 있다. 지난해엔 디지털휴먼을 별도의 비즈니스 파트로 독립시켰다. 메타버스의 핵심이 뭘까? 나만의 아바타가 지속가능한 공간에 접속하는 것이다. EVR은 디지털휴먼, 즉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나를 대신할 아바타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기업이다.
MMORPG 개발 역량으로 메타버스 판 키운다
▎AAA급 게임으로 제작중인 ‘무당’ 속 캐릭터인 이홍내 배우의 디지털휴먼.
디지털휴먼 외에 개발 중인 메타버스 사업은 없나.
아바타, 즉 디지털휴먼으로 메타버스 안에서 활동할 사람을 만든다면, ‘시티 제너레이터’는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다. 일일이 개발자의 손을 거쳐야 하는 가상공간 제작을 일종의 모듈 형태로 작업할 수 있도록 했다. 공간 제작 자동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공개된 벡터데이터(공간 정보를 나타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티 제너레이터를 활용하면 자동으로 건물을 짓고 텍스처를 입히는 등 더 쉽고 빠르게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사람과 공간이라는 베이스 기술을 메타버스, 게임, 영상 VFX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 EVR의 강점이다. 자체 메타버스 플랫폼인 ‘프로젝트V’와 실감형(XR) 콘텐트 사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EVR은 게임업계 드림팀이 모여 만든 회사다. 게임 개발 역량이 메타버스에 유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은 메타버스의 대명사처럼 돼버렸지만 로블록스와 마인크래프트는 본래 샌드박스게임이고, 포트나이트도 슈팅게임이다. 이들이 게임을 넘어 메타버스 게이트웨이로 상업적인 대성공을 거둔 건 그 본질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게임은 일단 어마어마한 수준의 이용자를 모을 수 있다. 엔터테인먼트적 요소, 즉 재미(fun)가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은다. 트래비스 스콧(Travis Scott)이 포트나이트에서 연 가상 콘서트로 엄청난 수익을 거둔 것처럼, 게임에서 출발한 메타버스 게이트웨이 사업자들이 게임에서 벗어나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EVR도 비슷한 전략인가.
그렇다. 나를 포함한 회사 멤버 대부분이 MMORPG 대작 제작 경험을 갖고 있다. 수천만 명이 자기 아바타로 한꺼번에 접속하는 세상과 플랫폼을 만든 경험은 전 세계에 아직은 게임 개발자들밖에 없다. 그러니 메타버스와 게임 개발자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물며 이제는 엔터테인먼트사들도 디지털휴먼 제작에 나섰다. 우리도 게임적인 재미를 갖춘 콘텐트로 모객에 집중하려 한다. 동시에 게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서 확장하려 한다. 게임 이상의 메타버스 환경을 갖춘 시스템과 인프라를 동시에 개발 중이다.
XR 콘텐트도 EVR의 경쟁력이다. 지난해 7월 공개한 영화 [기생충] VR 콘텐트에 쏟아진 반응이 뜨거웠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유네스코 사무국의 문화다양성 협약 부서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전시했는데, VR 기기를 통해 영화 속 배경을 재현해냈다. 봉준호 감독도 “내 영화의 메타포들을 잘 스터디해 배치했다”고 크게 감동하시더라. 영상을 보기 위해 건물 밖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국 콘텐트의 달라진 위상과 XR 기술의 시너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당 게임 개발 외에 다른 디지털휴먼 비즈니스 계획은.
EVR만의 3D 스캐닝 기술로 디지털휴먼 아카이빙을 기획 중이다. 정치인, 예술가, 스포츠선수 등을 디지털로 아카이빙해 기록하는 작업이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부터 전직 대통령을 흉상이 아닌 디지털로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우리 기술은 사람의 모공과 솜털, 혈액(안색) 같은 디테일까지 물리적으로 측량한다. 이런 기술과 자체 장비를 갖춘 곳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기술이 더 진보하면 SF 영화 속 장면처럼 아카이빙한 디지털휴먼과 후손들의 실시간 인터렉션이 가능한 수준까지 갈 것이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